2010. 9. 23. 11:47ㆍ성지순례
강화 성지순례
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초기부터 천주교와 연관을 맺고 있다. 조선에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철종의 할머니 송씨와 며느리 신씨에게 각각 마리아로 세례를 준 것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왕족이었던 이들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연유로 그동안 자식 상계군의 역모죄로 강화도에 귀향하야 살고 있던 은언군(철종의 조부)도
강화부(관청리 형방-천죽 강화성당 부근)에서 처형되었다.
강화도가 천주교와 또 다른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교난을 겪으면서였다. 박해가 시작되면서 그동안
천주교 신앙이 유입될 때 이용되던 육로 통행이 여의치 않게 되자, 적당한 해로를 찾게 되는데, 이로 인해 한강과
맞닿아 있는 강화도 연안 뱃길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특히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를 입국시키기 위한 해로를 개척하려고 서울 마포를 떠나 이곳 강화 갑곶 앞바다까지
왔으며, 그 후 연평도, 백령도를 거쳐 순위도 등산진에서 1846년에 체포된다.
그 뒤에도 이 강화 갑곶해안은 선교사들이 해로로 입경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통로가 되었다.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때는 강화도가 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대원군은 천주교 금지령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인 수 천명을 학살하는 사건을 일으
키는데, 이로 인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하게 된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는데,
이곳 강화도에서는 1868년에 진무영(현재 강화성당 부근)에서 최인서, 장치선,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등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1871년에 이곳 갑곶에서 직접적인 순교사건이 일어났다. 강화도 해역에 미국함대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불탄 사건의 책임을 물어 통상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이 이를 거절하게 되면서 군사적
충돌이 빚어진 것이다(신미양요).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그 결과 기록상 제물진두(현재 화수동성당 주변)에서 여섯 분이, 이곳 갑곶진두에서는 세 분이 순교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갑곶에서 순교하신 분은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세 분이다. 사연인 즉, 미국 군함이
물러간 이후, 같은 해 5월 29일(양력(7월 16일) 고종은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내용의
교서를 좌우 포도대장에게 내리게 되었고, 이때에 미국 군함에 몰래 찾아간 일이 있었다는 죄로 이 세 분이 효수
(梟首)된 것이다.
문헌상의 갑곶진두의 위치를 연구한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는 그 자리를 매입하여 지금의 갑곶순교성지를
조성 하였고,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집중적으로 개발하였으며, 사제를 파견하여 순례자들의 신심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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