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전등사 부처님 오신날 행사

2010. 5. 22. 19:56강화도 여행

강화 전등사(부처님 오신날)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 032)937-0125
○ 입장료 / 주차비 :  어른 2000원, 청소년 1300원, 어린이 1000원 /  소형 2000원, 대형 4000원

 

☆ 강화 전등사의 창건과 역사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 유명하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

   (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라 하였다. 
 

 

 

 

 

 

 

 

 

 

 

 

 

☆ 조선 왕실과 전등사의 관계 
    전등사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향화가 그치지 않았던 가람이다.
    하지만 여느 고찰과 마찬가지로 전등사도 몇 차례의 화마를 겪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이 재건을 시작해 1621년

    2월에는 전등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도 이때 중건되었다.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종찰로서 더욱 성장했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본을 4부씩 옮겨 적게 하여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겼고,
    다른 실록은 봉화군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했다.
 

 

 

 

 

 

 

 

 

 

☆ 강화 진종사에서 전등사로 개명까지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으며(1266년), 16년이 지난 1282년(충렬

    왕 8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나갔다.
    그만큼 고려 왕실이 전등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정족산의 산세가 안온한 명당이라는 것을 뜻한다.
    풍수가들 역시 ‘마니산이 할아버지산이라면 정족산은 할머니산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복지' 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등이란 ‘불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 호국 극복의 호국도량
    조선말기로 접어들면서 전등사는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게 했다.
    이때 양헌수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다.
    조선군을 얕잡아보던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크게 전의를 상실하여 조선에서 물러갔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해 국가사적,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등

    무수한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