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역사를 간직한 천년 고찰 강화 전등사 연등 출사

2013. 5. 17. 07:25강화도 여행


☆ 강화 전등사의 창건과 역사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 유명하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 (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라 하였다.

 

 

 

 

 

 

 

 

 

 

 

 

 
대웅전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

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좌우 옆면은 벽이나 앞 1칸에만 외짝으로 문이 있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
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나부상, 동물 조각, 연꽃 조각 등)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약사전
보물 제179호로 지정된 약사전은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하는 건물로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의 건물이다.
조선 중기 다포계열의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설치하였으며, 정면 각 기둥 위에는 공포를 배열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간포(기둥과 기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공포)를 설치하였다.
내부 천장은 중앙 부분에 우물천장을 두고 주위에는 빗천장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돌아가면서 화려한 연화당초문을

그려 놓았다.  대웅보전과 함께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어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겉모습이나 내부 장식도 대웅보전과 비슷하다.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이 약사여래불은 최근 금박으로 개금되어 있다.

 

 

 

 

 

 

 

 

 

☆  나부상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전등사 대웅전의 나부상은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그렇기에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 강화 전등사 유래

    전등사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번지 정족산성 안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사찰로서
    단군의 부소, 부우, 부여 세 왕자에게 각각 한 봉우리씩 맡아 쌓게 하였다는 삼랑성이 있는 민족의 성지이며
    강화도의 주봉을 이루는 마리산이 있고, 그 한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길상면 온수리에 이르러 다시 세봉우리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정족산이다.  전등사는 삼랑성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삼랑성의 동문은 암문이고 남문은 1977년에 복원하였는데  이 문들이 전등사의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이 문을 들어서 약간 경사진 산길을 따라 약 300m쯤 가면 북쪽으로 대조루에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 있고,
    여기서 한 단 높은 곳에 남향한 대웅보전이 이 건물과 축을 맞추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요사가 있고, 서쪽으로는 향로전, 약사전, 명부전, 전묵당, 종각이 있다.
    다시 서북쪽으로 한 층 높은 곳에는 삼성각이 위치하고 있어 전형적인 산지가람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1942년 편찬된 《전등사본말사지》에 의하면 전등사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에 아도화상이 개산하고 그

    이름을 진종사라 했으며,   또 고려시대 고종과 원종 때에 가궐을 짓고 대불정오성도량을 베푼 다음, 1266년(원종 7)

    에 사승이 이곳에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사찰 측의 전설에 의하면 이 절의 이름 전등사는 왕비 정화궁주가 옥등을 이곳에 시주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고쳐 전등사라 했다고 한다